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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조실록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록했던 이유
    맛난고의 정보 2022. 7. 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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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댓글 >

    거기에다 슨배임쓴거 고치면 사문난적임 ㅇㅇ
    하는 후기 사람파 교조주의 꼰대가 주류화되서
    못고치고.....


    사문난적이 아니라 고치는건 왕도 못하게 
    막아서임..
    교조주의 운운해도 그거로 실록 못믿는다 
    난리치는건 일뽕 정도고


    기본적으로 기록이 기록으로써 의미를 
    가지려면 권력자들이 자기 입맛 대로 바꾸면 
    안된다는 게 조선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음. 
    그래서 당시 편찬된 왕조실록은 왕도 바꾸질 
    못했는걸


    조선은 종이, 먹 사용량 엄청 많았겠다
    실록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기록이 일상이던데
    조선 후기에 민둥산 많았던 것도 
    기록 문화 영향도 어느 정도는 있을듯


    종이는 그래서 최종본 적을 때 기존 편집본은
    다 세초해서 재활용 했음


    역사문화공부 : 한지는 닥나무를 1년마다 
    베어서 만들엇기 때문에 참나무, 소나무가 
    베여나간 민둥산과는 관련이 없다


    기록 유출을 막는 방법이기도 했고


    한지는 닥나무로 만드는거라 현대식 펄프지
    랑은 아무상관없어


    후기 민둥산은 온돌 영향이 큼. 온돌은 잘 
    안 썼는데 소 빙하기 오면서 온돌이 사용이 
    급증하면서 생겼음




    글 읽고쓰는 인구가 5%도 안되는데 뭔 종이 
    먹 사용량이 민둥산을 만들어 걍 난방 
    때문이지
    흠뻑쇼에 물 300톤 썼다고 가뭄왔다는거랑
    똑같이 아예 말도 안되는 소리임




    광기의 사관 : 아 왕을 스토킹해서 모든것을 
    낱낱이 적어야겠구나!


    태종:저놈 유배보내
    사관:유배보내라고 하셧다(질질)


    ???: 오늘 임금께서 나를 쫒아내셨다 
    <= 진짜 기록 ㅋ


    저 태종 스토킹 하던 사관은 진성 스토커라
    자는데 잠입하고 별짓다하다가 귀양 가는 
    와중에도 자기 귀양 보낸거까지 마저 적어놓고
    갔다던데 ㅋㅋ


    당장 본문에 초반에만 선이 애매해서 
    다 적었고 그 이후로 안 그랬다고 나오는데


    첫단추를 진성 돌아이가 꿰는 바람에..


    그래서 명나라 영락제도 자기 나라에서는 
    기록 다 말소했던 흑역사가 이웃나라 조선의 
    실록에 남아서 사후 강제 수치플행 ㅋㅋㅋㅋ.


    즈언하~ 제가 이번에 대명제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아주 개꿀잼을 보았습니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하였사옵니다
    무어라? 대명제국 황제가 발기부전이라고? 
    크흠...거 다음번 사신단에 홍삼이랑 거 
    정력에 좋은거좀 보내야하는거 아닌가?




    실제로는 중후기 갈수록 업무에 관련된것만 
    적는식으로 간소화되어가긴 했다더라


    승정원일기에는 왕이 신하들이랑 회의하는중에
    누가 방귀뀐 기록도 있던데


    거기에 실록에도 기침소리 냈다고 꼽주는 
    기록 간간이 나옴.
    정원에 전교하였다.
    "군신 사이는 정이 부자와 같아서 오로지 엄한 
    것을 예절로 여길 수는 없으나,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하지 못하는 것이 본디 
    신하의 도리이다. 정원은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므로, 승지
    자리가 비면 신중히 가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동부승지 심전은 지난번 계복(啓覆)할 때에 
    여러 번 기침을 하였고 소리내어 침을 뱉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으니, 내가 보기에 온편하지 
    못할 뿐더러 입시한 재상 중에도 어찌 놀랍게 
    들은 자가 없겠는가. 임금과 신하가 서로 
    대하였을 때에 공손하지 못한 빛이 있으면 
    어찌 군신의 예절에 방해되는 것이 없겠는가. 
    작은 일일지라도 뒷폐단이 있을 듯하므로 
    말하는 것이니, 이 뒤로는 내가 예절을 중시
    하는 뜻을 몸받고 내가 진정으로 친근하는 
    도리를 생각하여 예절을 손상시키지 말고 
    직무를 다하도록 힘쓰라."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 6월 2일 
    무인 1번째기사-


    저기 이미지에는 후기에도 다 적었다고 
    나와 있는데 
    실제는 아님… 갈수록 중요한 내용만 나오는 
    경향이 강해짐
    그리고 저 교수님 말도 처음에 다 적어서 
    그게 이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초반에는 
    멀 적어야 할지 모르니 죄다 적다가
    나중에 가면 필요한것만 적는 체계가 
    생겼다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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