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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에 활약한 당시 최강의 기사들
    맛난고의 정보 2023. 3. 8.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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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지크프리트

    작센과 덴마크의 2만 연합군을 상대로 
    고작 1천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
    최전방에서 용맹하게 싸워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둠.
    하지만 높아진 명성에 지크프리트는 
    왕실의 치정싸움에 휘말렸으며
    결국 포도주를 마시고 무장해제한 상태에서 
    배신을 당해 창을 맞고 사망하게 됨.




    나이트 로베르 기스카르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는데 
    남자 형제가 무려 11명.
    형제가 많아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힘드리라 판단한 기스카르는
    형제 8명과 함께 남이탈리아로 넘어가 
    용병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됨.
    일신의 무력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기스카르를 교황이 눈여겨 봤고
    기스카르는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동로마제국과 싸우며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
    나가는 전투마다 연전연승하며 
    결국 칼라브리아 공작의 작위에 봉해짐.

    하인리히 4세의 신성 로마 제국이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공격하자
    알바니아를 공격중이던 기스카르가 
    그 즉시 회군하여 교황을 구출하는 등
    사나이 가슴을 울릴만한 간지나는 퍼포먼스를 
    일생 내내 보여주다.
    동로마 제국으로 가던 원정길에서 
    병에 걸려 사망하게 됨.




    나이트 윌리엄 마셜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기사"

    20살에 마상창시합에 처음 출전하자마자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마상창시합에서 무용을 뽐내며 
    승리를 거두며 유명세를 떨쳤으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장남이었던 
    청년왕 헨리(공동국왕)의 눈에 띄어 기용
    청년왕 헨리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에 참여하였으나 반란 도중 헨리가 사망.
    이후 갈 곳이 없어진 윌리엄 마셜은 
    성전기사단에 합류하여 십자군 원정에 참전함.

    십자군 원정이 끝난 이후 자유롭게 살던 
    윌리엄 마셜은 헨리 2세에게 채용되었고
    이후 헨리 2세의 충복으로 활약하며 
    리처드(후의 리처드 1세) 반란 때 
    리처드와 싸우게 됨.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연대한 리처드의 
    군대가 헨리 2세의 영지를 포위했을 때
    헨리 2세가 당장 윌리엄 마샬을 불러오라 
    명했고, 이에 달려온 윌리엄 마셜은
    키 196CM의 최강 무력 사자심왕 리처드와 
    결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윌리엄 마셜은 리처드를 그야말로 압도하며 
    죽이기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이 때 리처드가 목숨을 구명해달라 요청하였고,
    결국 리처드 대신 리처드의 말을 찌르게 됨.

    헨리 2세가 죽은 이후 왕위에 오른 
    리처드에게도 윌리엄 마셜은 특채 대상이었는지
    17세의 부인(당시 마샬은 43살)과 영지까지 
    내려주며 휘하의 기사로 데려왔고
    윌리엄 마셜은 리처드 1세의 오른팔로 
    눈부시게 활약하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음.

    이외에도 윌리엄 마셜은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나
    존이 리처드 1세의 통수를 치자 즉시 
    리처드 1세의 편에 서서 존의 야심을 
    저지했으며

    리처드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존 왕에게 직언을 
    하다 영지를 뺏기고 자식들을 납치당했음에도
    이번에는 오히려 존 왕의 편에 서서 존 왕의 
    반대파를 개박살내는 폭풍 충심 무쌍을 
    보여줘서 청년왕 헨리, 헨리 2세, 리처드 1세에 
    이어 결국 존 왕의 마음까지 뺏어가는 것에 
    성공.

    존 왕이 사망할 때 윌리엄 마셜을 불러

    "9살밖에 되지 않은 내 아들을 잘 부탁하겠네..."

    라고 부탁하는 수준이 되었고, 그 기대까지 
    완벽히 부응한 윌리엄 마셜은 훌륭한 섭정으로 
    활약.
    사망 2년 전까지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프랑스파 귀족들의 군대를 박살내는 위엄을 
    보임.




    나이트 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

    스페인 최고의 기사 중 하나이며, 
    이명은 '엘 시드'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1세에게 사령관으로 
    임명됐던 나이가 고작 22살이니
    그 당시 얼마나 뛰어난 기사였는지 
    그것만으로도 짐작이 가능.
    정치적으로 쉽게 정착하지 못해서 
    여러 군주 밑을 떠돌긴 했으나
    장장 10년간 참가한 전장에서는 
    승리만을 거두는 압도적 퍼포먼스를 보여줌.




    리처드 1세

    "무슬림에 대한 전대미문의 재앙"

    "저 자가 바로...........사탄 아니냐....?"

    "왕은 마을 밖으로 달아나는 적을 뒤쫓으면서 
    강풍이 배를 뒤흔들듯이 그들을 후려쳤다"

    "리처드는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돌격해 
    좌우로 칼을 휘둘러 적군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했다"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아일랜드와 키프로스의 
    영주였던 리처드 1세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별명은.......................'사자심왕'

    196CM의 큰 키에 쇠를 맨손으로 구부리고 
    허벅지 힘만으로 전투마를 다룰 수 있는 
    괴력의 남자가 덴마크식 도끼와 롱소드를 
    맹렬하게 휘두르며 달려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고 탁월한 전략적 식견이 있는 
    지장이었음에도 이미지에서 그런 면모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전략을 가히 압도하는 일신의 
    무력이, 적대국에서 교차검증이 가능할 정도로, 
    실제 현실에서 존재했기 때문.

    *덴마크제 도끼




    나이트 베르트랑 뒤 게클랭

    백년전쟁 시대 프랑스의 기사로,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가 있었다면 전반기에는 베르트랑이 
    있었음.
    20년간 프랑스가 잃어버린 영토를 10년동안 
    대부분 되찾아온 남자이며, 
    이명은 '브르타뉴의 독수리'

    베르트랑은 브르타뉴 지방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사실상 이름만 귀족인 
    집안이었고 몰락하고 가난해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베르트랑의 무재는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묻힐 재능이었으나 난세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법, 장성하는 베르트랑 앞에, 그의 무대가 될 
    백년전쟁이 다가오고 있었음.

    베르트랑이 17세가 되던 해, 랭스에서 
    어느 공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기사 토너먼트가 개최.
    형식상으로는 귀족이었던 베르트랑의 아버지 
    로베르는 이 토너먼트에 참가하고자 아들과 
    함께 출발하였으나 문제는 워낙 가난하다보니, 
    갑주와 군마는 커녕, 일꾼의 짐말과 누더기 
    철쪼가리를 걸치고 가게 됨.

    아버지를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에 도착한 
    베르트랑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눈이 부실 정도의 갑옷으로 치장한 기사들이 
    누더기를 걸친 아버지를 비웃고 있었기 때문..

    경기 참가자를 등록하는 관리자도 베르트랑의 
    아버지에게 귀족이 맞냐고 비아냥댔고
    그러한 수모를 당하고도 고개조차 들지 못 하는 
    아버지를 보며 17세의 젊은 기사 베르트랑은 
    격노.
    토너먼트 패배하고 퇴장하는 기사에게 달려가 
    엎드려서 부탁을 하는 지경에 이름.

    " 제발 말과 투구를 빌려주십시오! "

    상황을 들은 기사의 호의로 말과 투구를 빌린 
    베르트랑은 정체를 숨긴 채 토너먼트에 
    참가했고 아버지에게는 일부러 져줬지만, 
    아버지를 비웃은 기사 15명을 압도적으로 
    박살내버림.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 한들 고작 17세의 
    어린 기사가 모든 기사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
    경이적인 실력을 지닌 한 노르만 기사에게 
    베르트랑은 결국 패배하게 되었고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던 노르만 기사가 헬맷을 
    쳐내어 경기장의 모든 사람에게 들통이 나게 됨.

    17세의 기사 베르트랑의 
    인상적인 데뷔전이었음.

    이윽고 벌어진 백년전쟁에서 베르트랑은 
    의용병을 모집해 전쟁에 참가.
    잉글랜드 군대를 상대로 농성하던 몽모랑 성에 
    합류했으나 사람들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음.
    정식 기사 작위도 없는, 가난한 귀족의 
    어린 풋내기라는 평가를 내리며..

    하지만 그런 비난을 개의치 않던 베르트랑은 
    잉글랜드 군대의 지휘관의 전략을 예측해냈고
    기습을 하려고 하던 잉글랜드 지휘관을 고작 
    의용병 30명만을 데리고 숲속에서 역으로 기습.
    단신으로 지휘관에게 돌격하여 창을 찔러넣어 
    낙마시킴으로서 잉글랜드 군대는 패퇴하게 됨.

    이 전투 이후 베르트랑은 정식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짐.

    이후 랭스가 공격받자 베르트랑은 랭스 공방전
    에도 참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의
    공방전에서 랭스를 공격하던 잉글랜드군의 
    기사 윌리엄 밤브로우가 분위기를 가져오고자

    "나와 1대 1 대결을 펼칠 
    프랑스 기사는 없느냐!!!!!!!" 라고 소리쳤는데

    이에 베르트랑은 바로 응전하여 뛰쳐나와 
    윌리엄 밤브로우의 머리를 반으로 쪼개버렸고
    이 장면을 보고 경악한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으며 또다시 패퇴하게 됨.

    랭스 공방전 이후 위상이 올라간 베르트랑은 
    디낭 공방전 사령관으로 부임.
    잉글랜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5일간의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는데
    프랑스군은 디낭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어쨌거나 프랑스군보다 
    잉글랜드군이 강력했기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음.

    하지만 이때 디낭 밖으로 잠시 나갔던 
    베르트랑의 동생이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일어났고 사령관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의 사령관은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으나 베르트랑은 돈 대신 잉글랜드군의 
    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벌여 동생을 되찾겠다는
    답장을 보냄.

    상대의 사령관을 참살하여 순식간에 전세를 
    크게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잉글랜드군 사령관은 베르트랑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잉글랜드 랭커스터 공작의 
    주관 아래 20명의 기사가 증인으로 참석한 채로 
    결투가 시작됨.

    잉글랜드군 측에서는 프랑스에 있던 기사 중 
    최고의 기사인 켄터베리의 토마스 경이 
    나왔는데 격렬한 싸움 끝에 베르트랑이 
    토마스 경의 검을 날려버렸음에도 토마스 경이 
    결투를 포기하지 않은 채 말을 몰아 
    베르트랑에게 부딪히려는 행동을 취하자 
    개빡친 베르트랑은 구르기로 회피.
    번개 같이 말에게 칼을 꽂아넣은 뒤, 낙마한 
    토마스 경에 달려가 발로 머리를 내려찍었고
    투구를 벗긴 뒤 토마스 경이 정신을 잃을 때 
    까지 주먹으로 후두려 팼는데 보다 못한 
    중재자들이 나와서 베르트랑을 떼어 놓으며 
    결투는 베르트랑의 압승으로 끝이 남.

    약속대로 랭커스터 공작은 베르트랑의 동생을 
    즉시 풀어주었으며 휴전이 끝난 이후 다시 
    공방전이 시작됐지만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을 
    뚫지 못 했고 군자금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군 
    측에서 먼저 빼기가 어려운 상황임을 간파한 
    베르트랑이 '명목상의 항복' 을 제의.
    랭커스터 공작이 성 안에 자신의 깃발이 걸리는 
    것을 본 뒤에 정신승리를 하며 퇴각하게 되면서
    디낭 공방전은 프랑스의 실질적 승리로 종료, 
    베르트랑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게 됨.




    흑태자 에드워드

    잉글랜드의 왕족으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리처드 2세의 아버지.
    백년전쟁 초창기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무쌍을 
    찍으며 프랑스 전역을 유린.
    프랑스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존재이며, 
    항상 검은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흑태자라는 
    별칭이 붙음.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군대와 1356년 9월 19일 
    맞붙게 된 흑태자 에드워드는 왕의 군대였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3배 이상 수적 우위를 가진 
    프랑스군을 경계.
    무모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장 2세에게 협상을 
    요청했으나 장 2세는 바로 거절하였고
    이후 무리한 돌격을 감행한 장 2세는 
    결국 아들과 함께 흑태자에게 포로로 잡히게 됨.

    흑태자 에드워드는 포로로 잡힌 장 2세를 
    잉글랜드로 데려가서도 극진히 예우했으며
    심지어 왕세자인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로서 
    대접했기 때문에 이에 큰 감명을 받은 
    장 2세는 몸값 지불과 볼모를 약속으로 풀려난 
    이후, 이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깊은 수치심을 느껴 자신의 발로 
    잉글랜드 런던으로 돌아와 다시 포로로 잡힐 
    정도였음.

    정치적으로는 무능하여 평생 귀족과 백성의 
    미움을 받았으나 군사적으로는 엄청난 역량을 
    보이며 군대에게는 큰 사랑을 받은 흑태자는

    넓은 아량, 강자에 굴하지 않는 용기, 
    왕족임에도 일선에서 다른 기사를 참살하는 
    무용, 긍지를 소중히 여기는 성격, 압도적인 
    전공 등에 힘입어 기사의 귀감이라는 평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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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키호테가 없어서 무효


    ㄹㅇ 거인하고 싸운 전설의 기사인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를 뺀다는 게 말이 되나 ㅋㅋ


    윌리엄 마셜 
    마성의 남자 모든 군주의 마음을 빼앗은 자


    오십대 즈음에 나이차로 따지면 
    딸 수준인 처녀랑 결혼해서 자식도 많이 만듬


    윌리엄 마셜 
    배신과 갈아타기의 중세 시대에 일단 섬기는 
    주군은 죽을 때까지 절대 안 버렸네


    윌리엄 마셜이 
    기사도의 시작이라고 하기도 하니까


    흑태자 저건 프랑스 백성들에겐 재앙이었잖아. 
    마을 불지르고 남자 죽이고, 여자 .. 하고, 
    에오엠에 세보세라는 단어를 삽입하게 만든...
    기사로 취급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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